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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선 개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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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근혜 . . . . 7회 일치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에 의해 촉발된 여권 내 개헌 관련 논란, 북측의 장성급 군사회담 내용 공개
         |‘총선심판론’ 발언, 정부·청와대 인사 총선출마설, ‘유승민 부친상 조화 논란’, 개헌
         국회에서 세종시 수정안이 폐기되고 원안이 통과되고 나서 한동안 박근혜와 친이계와의 갈등은 잠시 가라앉았다. 그러나 2010년 말부터 한나라당은 개헌 논의를 시작했는데 차기 대통령 후보 지지율 1위였던 박근혜는 개헌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면서 친이계와의 갈등이 다시금 드러나기 시작했다. 2011년 2월까지 한나라당이 추진한 개헌 논의 대부분은 친이계가 주도하였으며 그 중심에는 [[이재오]]가 있었다. 이재오는 박근혜가 비협조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이에 대해 "대통령이 다 된듯이 행동한다"며 비판하기도 하였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2111625381&code=910100 이재오 "대통령 다 된 듯…" 朴 때리기 본격화) 경향신문 2011년 1월 11일</ref>
         * [[2007년]] [[1월 9일]] "참 나쁜 대통령이다. 국민이 불행하다. 대통령 눈에는 선거밖에 안 보이느냐?" <small>([[노무현]] 대통령의 4년 연임제 개헌 제안에 대해서)</small><ref>전용기, [http://www.fnnews.com/news/200701091332472226?t=y 박근혜 “참 나쁜 대통령”], 파이낸셜 뉴스, 2007년 1월 9일</ref>
         * [[2012년]] [[8월 17일]] "[[개헌]]은 국민 사이에 공감대가 형성됐을 때 추진해야 한다는 게 전제 조건이다. 부패 문제나 정책 연속성 등 여러 가지를 생각할 때 4년 중임제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small>(TV 토론회에서)</small><ref name="서울신문 김효섭기자" />
  • 김성곤 . . . . 5회 일치
         박정희의 친위대를 자처하면서 3선개헌에 회의적이던 김종필계와 대다수 공화당 인사들을 강하게 압박해서 [[3선 개헌]]을 성사시켰다.[* 3선개헌이 처음 불거졌을때 김종필을 선두로 해서 대다수 공화당 정치인들은 이를 반대했다. 장기집권한 이승만의 최후를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1969년부터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화당 국회의원들을 회유, 협박해서 결국 모두 찬성으로 돌려놨다. 당내에 막강한 독자계보를 가지고 있던 김종필을 압박하는데 선봉에 선게 김성곤, [[김진만(정치인)|김진만]], [[백남억]], [[길재호]] 4인방][* 한때 60명이 넘던 공화당내 개헌반대파 국회의원은 결국 3명 [[정구영]], [[예춘호]], [[이만섭]]만이 남았고, 결국 정구영-강제 정계은퇴, 예춘호-제명, 이만섭-낙선으로 모두 숙청되었다. 예춘호는 야당으로 넘어가서 1980년대 [[재야]]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고, 이만섭은 야인으로 지내다가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다시 당선되었다. 그리고 [[전두환]]의 집권 이후 [[한국국민당(1981년)|한국국민당]] 총재로 재기했다.] 이 과정에서 [[김진만(정치인)|김진만]], [[백남억]], [[길재호]]와 함께 소위 4인체제로 박정희를 대리해서 공화당을 관리하였다. 특히 [[재벌]]에게 해외차관과 정부발주공사의 10%를 무조건 자신을 통해서 상납하게 하면서 ~~[[뇌물]]의 제도화~~ 정권의 정치자금 창구를 단일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권과 재벌, 언론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는 그가 [[쌍용그룹]] 회장(재벌총수), 동양통신 사장(언론인)이면서 공화당 재정위원장(정치인)이자 박정희의 최측근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영향력을 과신한 나머지 1971년 민주공화당의 김진만, 백남억, 길재호 등과 함께 [[오치성]] 내무부장관 해임안을 가결시킨 '''[[10.2 항명 파동]]'''을 일으켰다. 박정희 분노를 산 김성곤 회장은 [[길재호]]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랑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고문(범죄)|고문]]을 당하고, 정계에서 쫓겨났다. 당시 트레이드 마크인 콧수염이 뽑힐 정도로 수모를 당했고, 심지어 시중에는 개처럼 두들겨 맞아서 생으로 변을 지렸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오죽했으면 신민당에서 문제삼으며 정권이 이들을 정치적으로 살해했다고 비판할 정도였다. 3선 개헌 이후에 소위 4인체제의 힘이 커지자 기회만 보고 있던 박정희가 항명파동을 계기로 싸그리 숙청해버린 것이다. 집권당 국회의원도 박정희한테 반대하면 잡혀가서 개처럼 두들겨 맞는다는 것을 본 이후에 [[민주공화당(1963년)|민주공화당]]과 정권내에는 박정희한테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모두 사라지고 완벽한 1인 독주체제가 된다. 이 때문에 노골적인 종신집권 의욕을 보인 [[10월 유신]] 때는 집권세력 내에선 전혀 반대가 없었다.
  • 전태일 . . . . 4회 일치
         {{인용문2|존경하시는 대통령 각하 옥체 안녕하시옵니까? 저는 제품(의류) 계통에 종사하는 재단사입니다. 각하께선 저들의 생명의 원천이십니다. 혁명 후 오늘날까지 저들은 각하께서 이루신 모든 실제를 높이 존경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길이길이 존경할 겁니다. 삼선개헌에 관하여 저들이 알지 못하는 참으로 깊은 희생을 각하께선 마침내 행하심을 머리 숙여 은미 합니다. 끝까지 인내와 현명하신 용기는 또 한번 밝아오는 대한민국의 무거운 십자가를 국민들은 존경과 신뢰로 각하께 드릴 것입니다.<br><br>...(이하 중략)...<br><br>저의 좁은 생각 끝에 이런 사실을 고치기 위하여 보호기관인 노동청과 시청 내에 있는 근로감독관을 찾아가 구두로써 감독을 요구했습니다. 노동청에서 실태조사도 왔었습니다만 아무런 대책이 없습니다. 1개월에 첫 주와 삼 주 2일을 쉽니다. 이런 휴식으로썬 아무리 강철같은 육체라도 곧 쇠퇴해 버립니다. 일반 공무원의 평균 근무시간 일주 45시간에 비해 15세의 어린 시다공들은 일주 98시간의 고된 작업에 시달립니다. 또한 평균 20세의 숙련 여공들은 6년 전후의 경력자로써 대부분이 햇빛을 보지 못한 안질과 신경통, 신경성 위장병 환자입니다. 호흡기관 장애로 또는 폐결핵으로 많은 숙련 여공들은 생활의 보람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br><br>응당 기준법에 의하여 기업주는 건강진단을 시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법을 기만합니다. 한 공장의 30여명 직공 중에서 겨우 2명이나 3명 정도를 평화시장주식회사가 지정하는 병원에서 형식상의 진단을 마칩니다. X레이 촬영 시에는 필림도 없는 촬영을 하며 아무런 사후 지시나 대책이 없습니다. 1인당 3백 원의 진단료를 기업주가 부담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전부가 건강하기 때문입니까? 나라의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실태입니까? 하루 속히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약한 여공들을 보호하십시오. 최소한 당사들의 건강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정도로 만족할 순진한 동심들입니다. 각하께선 국부이십니다. 곧 저희들의 아버님이십니다. 소자된 도리로써 아픈 곳을 알려 드립니다. 소자의 아픈 곳을 고쳐 주십시오. 아픈 곳을 알리지도 않고 아버님을 원망한다면 도리에 틀린 일입니다.<br><br>저희들의 요구는 1일 14시간의 작업시간을 단축하십시오.<br>1일 10시간 - 12시간으로, 1개월 휴일 2일을 일요일마다 휴일로 쉬기를 희망합니다.<br>건강진단을 정확하게 하여 주십시오.<br>시다공의 수당 현 70원 내지 100원을 50%이상 인상하십시오.<br><br>절대로 무리한 요구가 아님을 맹세합니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기업주 측에서도 충분히 지킬 수 있는 사항입니다.<ref>권태억, 《근현대 한국 탐사》 (역사비평사, 2007) 398~400페이지</ref>}}
         [[박정희]]에게 보낸 진정서에서 그는 "삼선개헌에 관하여 저들이 아지 못하는 참으로 깊은 희생을 각하께선 마침내 행하심을 머리 숙어 은미합니다. 끝까지 인내와 현명하신 용기는 또한번 밟(밝)아오는 대한민국의 무거운 십자가를 국민들은 존경과 신뢰로 각하께 드릴 것입니다.<ref>전태일,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돌베개, 1983) 136쪽</ref>…(이하 생략)…하루 속히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약한 여공들을 보호하십시요. 각하께선 국부이십니다. 곳(곧) 저희들의 아버님이십니다. 소자된 도리로써 아픈 곳을 알려드립니다. 소자의 아픈 곳을 고쳐 주십시오.<ref>전태일,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돌베개, 1983) 138쪽</ref>"라고 했다.
  • 백남억 . . . . 2회 일치
         1960년대까지는 [[박정희]]의 [[3선 개헌]]에 반대하는 등 ‘바른말 잘하는’ 소신파로 불리었다. 그러나 결국 [[김성곤]], [[김진만(정치인)|김진만]], [[길재호]] 등과 반 김종필 4인 체제를 형성하였고, [[김형욱]] [[중앙정보부]]장과 연합하여 1969년 [[3선 개헌]]을 주도하였다. 1971년에는 민주공화당 의장을 지냈다.
  • 윤천주 . . . . 2회 일치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전국구]]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3선 개헌]] 때 김종필과 친하여 개헌안에 소극적이었다는 이유로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천을 받지 못하였다.
  • 이철우(1955) . . . . 2회 일치
         [[2016년]] [[11월 25일]] [[새누리당]] 의원총회 비공개회의에서 개헌을 주장하다가 "(개헌이 안 되면) 이러다 세월호 학생들처럼 다 빠져 죽을 것"이라고 발언했다고 언론을 통해 보도되면서 그를 향한 여론이 --위의 사건과 맞물려서-- 더욱 나빠졌다. [[http://news.joins.com/article/20937723|중앙일보]]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52&aid=0000938082|YTN]]
  • 표창원 . . . . 2회 일치
         다만 분명히 기억해야 할 점은 수사의 90%이상은 경찰이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2014년 기준으로 검사 한 명 당 하루에 11.4건의 사건을 배당받고 있는데, '''잔업해서 12시간 근무를 해도 거의 한시간에 사건 하나를 해결해야 한다(...)''' 사실상 수사의 주체는 경찰이고 경찰이 수사한 그 내용을 바탕으로 검사가 영장 집행시에만 지휘하는게 일반적이다. 즉 사실 이미 경찰이 수사 개시해서[* 경찰의 수사개시권은 2011년 때 법안 개정을 통해 이미 법률적으로 명문화되어 있다.], 증거를 모아서, 용의자를 잡아서, 검사한테 주면 검사가 이를 확인한 뒤 "OK" 외치고 끝나는 상황인데, 이것을 검사가 수사지휘를 하고 있다고 말하기엔 무리가 있다. 즉 경찰에게 유리한 내용이라기보다는 수사/기소 업무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경찰은 수사에, 검사는 기소와 공소유지에 전념하자는 내용이다. 그리고 수사지휘권이 없어도 검찰의 기소권만으로도 얼마든지 보완수사를 요청하거나 경찰의 수사권을 통제할 수 있다고도 일선 경찰들은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장 청구권이 없으면 수사에 애로사항이 많다는 점에서[* 강제수사의 핵심은 영장이다. [[영장주의]]참조.] 검사의 권한은 해당 개정안에서도 여전히 막강하다.[* 실제로 표 의원보좌관의 SNS를 보면 해당 개정 내용을 접한 일선 경찰들이 표 의원의 보좌관(보좌관도 경찰출신이다.)에게 연락해서 "영장청구권를 왜 검찰에 남겼냐."라며 하소연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2018년에 있을 제7회 지방선거 때 같이 치뤄질 개헌 안을 살펴보면 검사의 독점적 영장청구권 폐지에 대해 동의하는 의원들이 있으므로 경찰에게도 영장청구권이 생길 가능성은 매우 높으며 개헌이 되지 않을 가능성에 대비해 경찰도 여러가지 방법을 강구하고 있다. 검사에게 영장을 청구할 시 검사는 법리적인 내용만 검토하게 하거나 혹은 변호사 자격을 가진 경찰을 특별검사와 같은 지위를 부여해 이들에게 영장청구권을 허용하게끔 하는 방안, 검사에 의해 영장이 반려되었을 때 법원에 항고를 할 수 있는 항고권 부여 방안 등이 논의되고 있다. 표창원 의원의 경우 발의한 법안과의 균형을 고려해 경찰의 항고권 보유에 찬성하고 있다. 이에 관해 2018년 6월 21일 KBS 라디오에 전화로 출연해 다시 한 번 본인의 주장을 내세웠다. 현재는 경할은 수사는 하지만 종결권이 없다. 이는 한 번 한 수사 결과를 검찰이 받아서 다시 검토하는 두 번 일이 되므로 수사 결과를 기다리는 피해자/피의자가 더 오래 기다려야 하는 폐단이 있었다. 그러나 경찰이 수사권을 가지고 종결까지 할수 있게 될 경우에는 이를 해소할수 있으며, 문제가 없으면 바로 기소하면 되고 문제가 있으면 검찰이 재수사나 보완을 지시할수 있으므로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그에 대해 "경찰 내에서 종결권이 있다면, 경찰이 껄끄러운 사건을 묻어버리면 어쩌냐" 하는 반론이 있는데, 이에 대해 표 의원은 "검찰에서 묻어버리면 이미 대민 창구인 경찰의 손을 떠난 후라 사람들이 알수 없지만, 경찰에서 그러면 사건 관련된 사람들이 언론과 온라인으로 문제 제기를 하게 되고, 수사 지휘권이 있는 검찰도 알게 되므로 경찰이 사건을 묻어버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라고 주장하였다.
  • 김을동 . . . . 1회 일치
         어쨌든 아버지가 소싯적에 나름대로 극우활동을 한 전력이 있다지만 국회의원이 된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제도권에서 활동하면서 [[사사오입 개헌]] 반대도 하고 진보당과 신민당에 입당하기도 한데다가 [[국회 오물 투척 사건]]까지 일으키기까지하는 등 쭉-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면서 이승만과 박정희에게 저항했던 이력이 있기때문에[* 문제는 그 국회의원 선거활동때문에 돈을 많이 까먹어서 김을동 본인이 그때 '''개고생''' 하면서 살았다고 얘기할 정도였으니. 그나마 먼 미래에 그것이 바탕이 되어 국회의원 직을 할수 있긴 했으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1991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꼬마민주당에 입당하였고 서울시의원에 출마했다. 김을동이 이전부터 배우로 잘 알려진 인물인데다가 당시 [[장군의 아들]]이 대히트를 쳤기 때문에 후광효과가 기대되었지만 막상 선거전에 들어가니 저조한 투표율+야권단일화 실패로 인해서 결국 선거에서 근소한 표차이로 낙선했다.[* 이 때 민주당에 같이 입당했던 사람이 야구선수 [[최동원]]이었다.] 이후로도 민주당 당원으로 재직하다 1995년 지방선거 때 [[무주군]] 제3선거구에서 당선됨으로써 의정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듬해 민주당이 [[새정치국민회의]]와 [[통합민주당(1995년)|통합민주당]]으로 분열 사태가 일어나는김에 민주당을 탈당하고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하면서 정치노선을 바꿨고 [[15대 총선]] 때 [[익산시]]에 출마했으나, 4위에 그쳐 낙선했다. 참고로 이 선거 때 '''상대 후보가 [[노무현]], [[이명박]], [[이종찬(1936)|이종찬]]이었다.''' 이후로 2000년 총선에서 [[전라북도]] [[순창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으며, 이후 자민련을 탈당하고 한나라당에 입당했지만 역시 [[열린우리당]] [[김태년]] 후보에게 밀려 낙선했다.
  • 김재규 . . . . 1회 일치
         김재규는 [[10.26 사태]] 직후 유신의 잔재를 5개월 내로 설거지하겠다는 생각으로 전국으로 비상계엄령확대를 구상했는데,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4475563|출처1]], [[http://www10.breaknews.com/sub_read.html?uid=64710|출처2]] 민주공화당은 이러한 구상안에 동의했을 가능성이 낮다. 10.26 직후 [[김종필]]이 [[민주공화당(1963년)|민주공화당]]의 총재로 만장일치 추대되었는데, [[김종필|JP]]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시절 청구동 가택수색과 협박까지 당한터라 김재규에게 호의적이기도 어려웠다.[[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2080100209211001&edtNo=1&printCount=1&publishDate=1992-08-01&officeId=00020&pageNo=11&printNo=21900&publishType=00020|#]] 거기다 10.26 이후 [[김종필|JP]]는 [[김영삼|YS]], [[김대중|DJ]]과 함께 개헌과 민주회복 이행에 공감하고 협조해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민주공화당 역시도 김재규의 구상에 동의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0022600329201017&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80-02-26&officeId=00032&pageNo=1&printNo=10586&publishType=00020|#1]],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0022600099201012&edtNo=1&printCount=1&publishDate=1980-02-26&officeId=00009&pageNo=1&printNo=4299&publishType=00020|#2]]
  • 서상일 . . . . 1회 일치
         1952년 전쟁중 임시수도인 부산 충무동 광장에서 열린 6ᆞ25기념식장에서 당시 현역의원인 2대국회의원 김시현의 사주를 받은 전의열단원 유시태가 이승만 대통령을 권총으로 저격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일이 있었는데 당시 기념식 행사를 촬영중이던 국립영화제작소의 촬영카메라에 김시현이 쓰고있던 중절모에서 권총을 꺼내 유시태에게 건네주는 장면이 포착되어 두 사람은 모두 특무대에 체포되었다 배후를 수사하던 특무대는 전국회의원 서상일이 당시 현역의원이던 김시현에게 거사자금으로 2백만원을 지원한 사실을 밝혀내고 그를 구속했다 그런데 의아한 점은 당시 치안국장(오늘날 경찰청장) 윤우경도 사전에 암살음모 첩보를 입수했음에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김시현을 불러다 한번 다그친 후에는 차량이 없는 그에게 경찰찌프차와 운전사까지 대여해주었던것이다 구속된 서상일은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집행유예로 풀려나왔지만 피선거권이 박탈되어 1954년의 3대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할수 없게 되자 자신의 선거구(대구 을구)에 조병옥을 대신 출마시켜 당선되도록 했다 이런 인연이 있음에도 후일 서상일이 조봉암의 호헌동지회 참가를 설득하자 조병옥은 냉정히 거절하였으며 이때문에 두 사람은 멱살잡이와 욕설까지 주고 받게 된다.그런데 이때 조병옥 장면 김준연 등 주로 보수야당 한민당 출신들이 조봉암의 민주당 합류를 반대했던 것은 이승만의 사사오입개헌 발의안에 서명까지 했던 자유당 출신 김영삼도 아무 이의없이 받아들인것을 감안하면 매우 자가당착적인 것이었다
  • 서종렬 . . . . 1회 일치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한국당 후보로 경상북도 [[포항시]]-영일군-[[울릉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정의당]] [[박경석(1937)|박경석]]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당선 후 민주한국당을 탈당하여 [[신한민주당]]에 입당하였다. 그러나 신한민주당 내에서 [[대통령 직선제]] 대신 [[의원 내각제]] 개헌을 주장하며 신보수회라는 계보에 참여하였다. 1986년 [[유한열]] 등과 신한민주당을 탈당하여 [[민중민주당(1986년)|민중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민중민주당에서 정책위원회 [[의장]]을 지냈다. 1987년 [[통일민주당]] [[분당(정치)|분당]] 이후 민중민주당이 신한민주당에 도로 흡수되자 신한민주당에서 당기위원회 위원장, 정책위원회 의장을 지냈다. 그러다가 같은 해 치러진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다시 신한민주당을 탈당하여 [[통일민주당]]에 입당하였다.
  • 슈가(방탄소년단) . . . . 1회 일치
          * 처음 연습생으로 들어왔을 때 [[RM]]과 다른 연습생들 두 명이 아디다스 삼선 트레이닝복 각각 남색, 초록색, 검은색을 입고 있던 탓에 '나도 저걸 사야 되는구나' 싶어서 파란색 트레이닝복을 샀다고 한다.
  • 이기택 . . . . 1회 일치
         [[박정희]]의 [[3선 개헌]]에 반대하며 ~~비장한 표정이 인상적인~~김영삼 전 대통령(가운데)과 함께 거리로 나섰다. 오른쪽은 [[김상현(1935)|김상현]] 당시 신민당 의원.
  • 정상헌 . . . . 1회 일치
         * [[삼선중학교]]
  • 정태성(정치인) . . . . 1회 일치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공화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친 [[김종필]]계에 속하면서 [[3선 개헌]] 반대 운동을 하다가 민주공화당에서 제명되었다.
  • 홍진 . . . . 1회 일치
         * [[1924년]] 5월 임시의정원 내에서 개헌 문제로 분란이 일자 사임후 [[장쑤 성]] [[전장]]에서 은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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